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O.
기획: 권혁규
전시장 양쪽 벽에 각각 4개의 그림이 마주보게끔 걸려 있다. 박그림 개인전 《사사 四四》에서는 나란히 놓기, 반복하기, 마주보기, 중첩하기의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얼핏 단조로워 보이는 전시의 구조는 단순 반복이 아닌 이전 작업의 내용과 형식을, 그것의 재고와 확장의 시도를 경유한다. 그렇게 다른 무엇으로의 이동이자 또 다른 층위의 중첩으로 작가의 이번 개인전을 제시해 본다.
《사사 四四》의 몇 가지 이동 경로들을 살펴보자. 가장 먼저 불교미술의 ‘사사(師事)’. 박그림은 전통적 방식의 불교미술을 도제식으로 사사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과거의 전통을 무조건적으로 답습하지 않는다. 작가는 오히려 이전의 범례와 규칙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탐구하고 재해석하며, 작업은 일종의 번안과 갱신의 과정에 더 가까워 보인다. 작가는 주로 비단의 앞·뒷면에 물과 물감(석채, 분채, 동양화물감)을 연하게 섞어 여러 번의 붓질을 쌓는 전통적인 고려 불화의 담채기법과 배채법을 통해 작품을 완성한다. 동시에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호랑이 도상들과 ‘심호도(尋虎圖)’는, 개인의 구도 여정을 소를 찾아 길들이는 과정에 비유한 선종화 전통의 ‘심우도(尋牛圖)’[1]를 자의적으로 전유하고 재구성한 결과이다. 이처럼 박그림은 전통불화의 방식과 형식을 고수하는 한편, 그 이면에 자기 정체성을 번안된 도상과 재구성된 이야기로 드러낸다. 이를 박그림 작업의 독특한 이중 구조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이중 구조의 한 축에는 작가의 퀴어 정체성이 자리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도 여러 퀴어 코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데, 실제 전시에서는 직립한 남근의 형태, 분출하는 사정의 장면, 구멍 등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물과 불처럼 서로 다른 성질의 것들을 뿜어내는 (2024)과 (2024)에서 호랑이 꼬리는 남성의 성기 모습으로 사정의 장면을 노골적으로 이미지화하고 있으며, 같은 작업 속 열린 커튼은 일반적인 면직물보다는 살, 혹은 신체 일부가 아닐까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밖에 꽃, 혹은 성기 모양의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붉은 구멍과, 그 안 혹은 밖에서 짠하고 모습을 드러낸 (2024)의 호랑이, 탱화에서 고귀한 대상들에만 씌워진다는 우산 아래 탱탱한 호접란처럼 성기를 그려놓은 듯한 (2024)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사 四四》에서 확인되는 자기 정체성의 이미지화는 일종의 자전적 서사를 경유하는데, 이는 작가의 과거 작업들, 그리고 그 작업이 맺고 있는 여러 관계와의 ‘겹쳐짐’으로써 한 번 더 강조되는 듯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자기-의식적 이미지로는 앞서 언급한 심호도의 호랑이를 말해볼 수 있다. 작가는 과거 (2019)에서 보살(들)이 작가(로 추정되는 인물)를 찔러 호랑이가 태어나는 장면을 그렸다. 여기서 작가는 상실의 끌어안음으로 자신과 동일화된 호랑이를 다른 인물(보살)들과의 관계 속에 병치시키곤 했다. 하지만 이번 개인전에서 그 인물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몇몇 작업은 마치 과거의 작가/호랑이가 주변 보살들을 없앤 사후의 장면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보살들은 어디로 갔을까. 호랑이는 어떤 변화를 겪은 것일까. (2018)과 같은 과거 작업에서 알 수 있듯, 작가/호랑이는 관계 안에 자리했고 또 거기에 상당 부분 의지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작가는 2018년 첫 개인전 《화랑도 花郞徒》에서 주변 인물들을 그리고, ‘게이’ 이미지를 동경하는, 때로는 그런 스스로를 혐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이중 구조를 자기-인식의 차원에 적용해 본다면, 박그림의 4번째 개인전 《사사 四四》는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확인했던 과거 도상들을 재고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보살들이 사라진 《사사 四四》의 화면 속 호랑이는 주변과의 관계가 아닌 스스로를 살피는,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확인하는 형식이자 도상인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과 에서, (주로 부처 형상에 그려지는) 신광/두광을 두른 호랑이는 겉과 속의 서로 다른 성질 속에서 참선수행의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커튼이 쳐진 무대 위 모든 인간관계가 연극 같고 드라마 같은 오늘, 저 호랑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의지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 작업에 등장했던 보살들이 지워진 채 위아래에서 창을 찌르고 있는 형상만 남은 (2024), 역시 인물이 사라진 채 오직 동진보살의 투구와 삼지창만이 남겨진 (2024)의 이미지들도 함께 읽어볼 수 있다.
결국, 《사사 四四》의 마주보기, 반복하기, 다시쓰기는 가르침을 받는 ‘사사(師事)’와 함께, 거절하다의 ‘사辭’, 죽음을 뜻하는 ‘사死’, 그리고 하잘것없이 작은 것을 가리키는 ‘사些’를 동시에 경유한다. 전시의 구조 안에는 이미 지극히 사사로운 것, 사적인 것을 떠올리게 하는 의미가, 또 무언가를 지우는 행위가 내포되어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번 전시는 개별 작품뿐 아니라 더 먼 과거의 전통과 작가의 이전 작품들을 함께 입체적인 관계 속에서 보게 하고, 무엇이 반복되고 또 변주되고 있는지, 또 어떤 감상과 암시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겹쳐 보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같은 전시의 상호 텍스트성은 여러 형식과 내용, 서사들이 하나로 모이는 응집성과 그것이 겹을 쌓아나가는 확장성을 동시에 나타낸다. 전시장 중앙에 자리한 상대적으로 큰 사이즈의 (2024), (2024)에서 보이는 심우도의 ‘인우구망(人牛俱忘)’ 도상을 닮은 이미지는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박그림 작업의 이중성과 복합성을, 그것의 응집성과 확장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들은 표면적인 현세의 이야기 혹은 소와 목동 간에 벌어진 일—어떤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모두 지워버린 채, 심우도의 ‘인우구망’[2]처럼, 단순한 자국 외에는 어떤 해석을 위한 단초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게 지극히 단순한 이미지, 배경과 여백은 ‘시작과 끝, 안과 밖, 나와 타자, 과거와 현재, 전통과 새로움’ 등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자기-의식적 장면들을, 구도(求道) 여정의 중첩과 순환을 지지한다.
《사사 四四》에 포함된 자화상 (2024) 속 작가의 모습은 벌어진 틈 안에, 심지어는 찢어진 상태 속에 등장한다. 여기서 ‘찢어짐으로의 나타남’은 앞서 언급한 과거작 (2018)이나 (2021)에서 포착되는 주변과의 관계 속 등장과는, 또 자기혐오와 타인을 동경하는 모습과는 다른 성격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사사 四四》의 마주보기는 말 그대로 작가 작업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예를 들면 불교미술의 전통, 퀴어 정체성, 인간관계, 과거의 경험과 사건들을 총체적으로 직면하고 있음을 지시하는 것은 아닐까. 각기 다른 시간과 경험, 형식과 서사를 횡단하는 작업을 마냥 자전적이라고 단언할 순 없겠지만, 퀴어 정체성과 함께 타자와의 관계를, 그 현전을 다양하게 사고하는 의식과 형식으로, 또 그것의 공유와 확장으로 이번 개인전을 제시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확대된 여백과 밋밋한 배경의 얼핏 단조로워 보이는 작품들을, 전보다 내밀한 시공 안에서 스스로의 이질성을 확인하고 병치하며 중첩하는 시도로, 혹은 무한(한계-없음)의 화면으로 확장하는 시도로 인지해 본다. 그렇게 작가의 퀴어 정체성과 동시대 서사가 불교미술의 형식과 내용에 접목되고 새롭게 탐구되며 어떤 극복에 이르는 장면을, 이내 다시 마주하고 혼동되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1] “선의 수행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그림으로, 수행단계를 10단계로 하고 있어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심우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3873.
[2] 10개 도상으로 이루어진 심우도/십우도에서 8번째에 해당하는 “인우구망(人牛俱忘)은 소 다음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텅 빈 원상만을 그리게 된다. 객관이었던 소를 잊었으면 주관인 동자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 것으로, 이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게 된다.”, 인용 출처는 위와 같음.
박그림 개인전 《사사 四四》
권혁규(전시기획자)